"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표지만 보고 판단하지 마라." – Jamie Lee Cur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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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Analogue Pocket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 건지 어릴 때 패밀리(패미컴) 말고는 부모님이 사주시질 않아 이런저런 기기를 많이 못 해봐서 그런 건지 레트로 게임, 특히나 휴대용 게임기에 대한 갈증이랄까 향수가 좀 있는데요. 게임보이는 상당히 고가여서 사는 건 아예 엄두도 못 내봤고 주변에 흔하던 테트리스 게임기(블럭 모양이 네모난 것을 픽셀처럼 이용해 나름 레이싱 게임, 뱀 게임등 다른 게임도 가능)로 만족하고 패미컴만 열심히 했었죠. 동네 형이었나 친구였나 슈퍼 패미컴이 있어서 놀러 가서 드래곤볼Z 초무투전하고 스트리트 파이터2 했던 기억도 나네요. 이후 시간이 좀 지나고 에뮬레이터라는 걸 알게 되고 컴퓨터 학원에서 게임보이 에뮬레이터로 짱구를 진짜 열심히 했었고, 이후에 컴퓨터가 생기면서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 하베스트문, 천지창조 등을 하다가 피시 게임에 빠지면서 잊고 지내다 입대하고 인터넷도 안 되는 컴퓨터에 밖에서 에뮬레이터랑 구해와서 휴식 시간에 역전재판 엔딩 보고 했던 기억도 살짝나네요.

앨범에서 겨우 찾은 당시 사용하던 패미컴. 그때는 몰랐지만 보다시피 카피판.
당시 유행했던 테트리스 게임기. 중간의 저 굴곡이 특징. 출처

그런데 이걸 이제 와서 지금 다시 그냥 컴퓨터로 하자니 뭔가 그 느낌이랄까 어릴 때 그냥 마냥 하던 재미도 덜 한 것 같아서 패드도 써보고 당시 그 브라운관 티비처럼 약간 뭉개져서 상도 조금 안 맞아 흔들거리고 스캔 라인도 있고 끄트머리로 갈수록 휘어지게 해서 볼록한 느낌도 나게 화면 셰이더도 적용 해보고 하는데 이런 거랑 상관없이 결론은 접근성이 우선인 것 같더라고요. (잠깐 다른 얘기지만 기억 속 브라운관, 그러니까 CRT로 보던 화면과 나중에 LCD로 다시 본 화면이 어딘가 괴리가 있어 보이는 이유는 추억보정이니 단순히 CRT 화면이 뭉개져서가 아니고 이 뭉개짐, 그러니까 CRT와 LCD의 픽셀 표현 방법 차이와 해상도의 발전으로 인해 결과물이 완전 다르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 극단적인 예)

이제는 다 늙어서 한 번 하자고 컴퓨터나 콘솔 이거저거 켜거나 하는 거에서부터 에뮬레이터 설정 만지고 하는 것도 귀찮고 어릴 때 하던 것처럼 그냥 카트리지 꼽고 바로 켜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휴대용 기기로 하는 게 접근성이 가장 높고 제일 속 편한 것 같더군요. 집에 있는 기기들 PSP니 NDS니 3DS니 에뮬레이터 넣어서 해보는데 항상 신경이 쓰이는 게 해상도더라고요. 슈퍼 패미컴이 가장 크게 렌더링하면 512×478까지 해상도가 나오는데 앞에서 말한 기기들 화면 해상도보다 커서 제대로 픽셀이가 퍼펙트하게 정수 스케일로 나오질 않아서 항상 넣어보고 실망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던 중에 작년에 아는 분께서 비타를 안 쓴다고 주셔서 날름 받아왔습니다.

비타는 해상도가 960×544라 슈퍼 패미컴 포함해서 대부분 기기 전체 해상도를 다 그리고도 꽤 남아서 픽셀이가 아주 퍼펙트하게 나오더군요.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안 맞는 것도 있는데 그래도 화면이 크니 3DS에서 할 때처럼 글자가 뭉개져서 안 보이고 그런 건 없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비타가 에뮬레이션 프론트엔드로 사용하는 게 레트로아크인데 이게 설정이 너무나 많고 복잡하며 로딩도 약간 느린 것도 있고 해서 몇 번 돌려보다가 결국 귀찮음에 포기를 했습니다.

보고 있으면 진짜 눈 돌아가는 레트로아크 설정 화면. 출처

예전부터 유튜브에서 레트로 기기라던가 휴대용 에뮬레이터 기기들 영상을 보곤 했는데요. 에뮬레이터는 요새 종류도 많아지고 생긴 것도 깔끔하고 휴대용도 플스1까지는 어느 정도 돌릴 수 있고 다 좋은데 여기도 결국은 레트로아크에다가 좀 저렴한 거는 해상도가 낮아서 마음에 딱 드는 건 없더군요. 그러던 중 Analogue라는 회사에서 슈퍼 패미컴 복각 기기를 만든 걸 보게 되었습니다.

하드웨어 에뮬레이터

에뮬레이터를 평가하는 항목 중에 ‘정확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원본 기기를 얼마나 정확하게 구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에뮬레이터의 경우 하드웨어 스펙에 의한 버벅임까지 똑같이 구현하며 호환성은 거의 100%에 육박합니다. 슈퍼 패미컴의 경우 아주 ‘정확한’ 소프트웨어 에뮬레이터로는 higan이 있습니다. 대신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다 보니 사양이 높은 편이고 따로 OS가 필요합니다. Analogue에서 나온 Super Nt는 FPGA라는 반도체를 이용해서 하드웨어 레벨에서 원본 기기를 똑같이 구현합니다. 별도 OS도 필요 없으며(외부 설정을 위한 OS는 있습니다.) 실기와 똑같기 때문에 위 영상에서 보시다시피 실제 카트리지를 꼽아서 할 수도 있습니다. 하드웨어 레벨로 실기를 구현한 것이기 때문에 레트로아크처럼 복잡한 설정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Pocket이라고 똑같이 FPGA를 사용해서 게임보이를 복각한 기기를 판다고 올라왔었습니다. 역시 하드웨어 에뮬레이팅이라 설정도 따로 필요 없고 원본 기기랑 거의 똑같으며 복각이라 카트리지도 꼽아서 할 수 있고 해상도는 게임보이의 10배인 1600×1440(661ppi)이어서 남는 픽셀은 그 당시 LCD를 흉내 내는데 쓰고 해서 완전 취향 저격이더군요. 그런데 이런 미친 스펙의 기기다 보니 가격이 엄청났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른 휴대용 에뮬레이터 3-4대는 살 수 있는 돈이어서 그냥 아 비싸다만 하고 있었지요.

작년 연말에 돈이 좀 생겨서 컴퓨터도 사고 헤드폰도 사고 이거저거 사고하다가 갑자기 저게 생각이 딱 나서 바로 그냥 주문했습니다. 이게 만드는 건 느린데 수요가 많아서 그런지 먼저 받은 사람들 보니 거의 일 년은 기본으로 기다리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도 올해 연말에나 오겠지 했는데 갑자기 8월 중순에 보낸다고 하더니 24일에 왔습니다.

기기 화면 구석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은 첵스 팥맛 상자입니다.

실물을 직접 해보니 아주 마음에 드네요. 특히나 실제 게임보이 화면을 흉내 내는 기능이 마음에 쏙 드는군요. 백라이트가 있어서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가지고 있는 기기들과 비교하니 꽤나 비슷하네요. 설정도 따로 복잡하게 할 것도 없고, 이게 처음 발매 당시에는 진짜 딱 게임보이 카트리지(어댑터로 게임기어, 링스도 가능)만 꼽아서 하는 그런 기기였는데 지금은 FPGA를 직접 사용할 수 있게 풀어줘서 게임보이 외에도 패미컴, 슈퍼 패미컴, 메가드라이브 등 다양한 기기들을 돌려볼 수 있습니다.

Pocket 게임보이 화면 모드 실제 화면
실제 게임보이 화면 출처

앞서 말한 게임보이 화면 모사 기능입니다. 실제 게임보이의 LCD는 전자시계 같은 곳에 들어가는 PMLCD입니다. 흑백만 표시 가능한 LCD인데요. 픽셀 간 거리가 좀 있어서 사이사이에 선이 보입니다. Pocket은 해상도가 실기의 10배다 보니 남는 픽셀로 그 사이사이 선을 흉내 냅니다. 실기는 PMLCD의 느린 반응속도 때문에 잔상이 많이 남지만, FPGA는 화면과는 상관이 없어서 그런지 그것까지 구현하기는 너무 과해서 그런지 잔상까지는 나오진 않네요.

Pocket 게임보이 컬러 화면 모드 확대
실제 게임보이 컬러 화면 확대

게임보이 컬러와 게임보이 어드벤스도 비슷한 방식입니다. 게임보이 컬러도 게임보이와 똑같이 PMLCD인데 여기에 픽셀을 RGB 서브 픽셀로 분리해 넣어서 색이 들어간 화면을 그립니다. 첫 번째 사진은 Pocket에서 본 게임보이 컬러 화면이고 보시면 작은 네모가 Pocket 기기 실제 LCD의 픽셀이고 큰 네모가 화면 상 표현되는 게임보이 컬러 픽셀입니다. 왼쪽은 화면 모사 기능을 끈 일반 화면이고 오른쪽은 기능을 켠 화면입니다. 먼저 색상을 실기와 비슷하게 맞추고 흰색인 픽셀을 비교해 보시면 확실한데 분리된 RGB 서브 픽셀까지 묘사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게임보이와 게임보이 컬러 모두 실기는 백라이트가 없어서 비교하기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둘 다 아주 흡사한 화면을 보여줍니다.

요즘 기기 다 보니 게임의 세이브 지원 여부와 상관없이 아무 곳에서나 강제로 세이브 로드도 되고 슬립 기능도 있어서 잠깐 켜서 하다가 멈추고 다른 것 하다 바로 다시 켜고 이어 할 수 있어서 아주 좋네요. 오랜만에 어릴 적 당시로 돌아간 것 같아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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